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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희 작가의 화면은 고요한 수면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잔잔한 흔들림이 끝없이 이어집니다. 물결 위로 번지는 형상, 흐릿하게 비껴가는 반영, 그리고 그 사이에 잠깐 열리는 경계의 순간들. 정상희 작가는 ‘보이는 것’보다 ‘비치는 것’에 더 오래 머무르며, 내면의 풍경과 시간이 남긴 결을 회화로 더듬어 갑니다.
이 작업이 흥미로운 지점은, 현실과 환상 사이를 단번에 가르지 않는다는 데 있어요. 과거와 현재가 겹치고, 익숙함과 낯섦이 동시에 떠오르는 장면을 통해 정상희 작가는 “나를 본다”는 행위 자체를 다시 묻습니다. 흔들리는 반영은 결핍이나 실패의 표시가 아니라, 오히려 성장의 과정이 남긴 흔적처럼 보입니다.

물결과 반영, ‘나’를 다시 보는 방식
수면 위에 비친 형상은 분명 ‘나’인데, 어딘가 낯설게 느껴집니다. 다가가면 가까워질수록 더 흐려지고, 손을 뻗으면 일렁임이 먼저 반응하죠. 정상희 작가의 회화는 이 미묘한 감각을 그대로 살립니다. 반영은 완전히 고정된 초상이 아니라, 순간마다 달라지는 내면의 표정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작품은 관람자를 한 번 더 멈추게 해요. ‘나는 지금 어떤 얼굴로 나를 보고 있지?’ ‘내가 회피했던 조각은 무엇이었지?’ 이런 질문들이 물결처럼 번져 나옵니다. 정상희 작가가 포착하는 흔들림은 불안의 증거라기보다, 스스로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신호처럼 읽힙니다.

회전목마와 시계, 기억이 남긴 형태들
화면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오브제들은 장식이 아니라 기억의 장치입니다. 회전목마, 회중시계, 램프와 빛의 오브제들. 변하지 않는 형태를 가진 이 사물들이 오히려 ‘변해온 감정’을 담아내는 그릇이 됩니다. 정상희 작가는 이 오브제들을 통해, 시간이 흘러도 쉽게 옅어지지 않는 감정의 잔향을 끌어올립니다.
특히 회전목마는 멈추지 않는 회전의 리듬으로, 과거의 한 장면을 계속 다시 돌려보게 하는 힘을 갖습니다. 시계는 시간을 재는 도구이면서도, 때로는 시간에 갇힌 마음의 표정이 되죠. 그리고 빛은 어둠을 지우는 강한 조명이라기보다, 조용히 스며들며 마음을 조금씩 풀어주는 작은 울림으로 작동합니다. 이 조합 덕분에 정상희 작가의 세계는 몽환적이면서도 감정적으로는 놀라울 만큼 현실적입니다.

수평선 너머의 공간, 의식과 무의식이 만나는 통로
작품 속 수면과 물결, 수평선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넘나드는 통로’로 기능합니다. 현실과 환상, 의식과 무의식이 분리되지 않고 이어지는 자리. 수평선 너머는 제한 없는 상상의 영역처럼 열려 있고, 그곳은 한편으로는 마음이 쉬어갈 수 있는 내면의 평온을 암시합니다.
여기서 정상희 작가는 ‘나’가 타인의 시선과 관계 속에서 흔들리며 형성된다는 점에도 닿아 있습니다. 반영의 이미지는, 내가 나를 규정하기보다 ‘비쳐진 나’를 통해 스스로를 재구성해가는 과정처럼 보이거든요. 그래서 관람자는 화면 속 반영을 보면서, 결국 자기 안의 반영을 함께 마주하게 됩니다.

불완전함을 껴안는 순간, 흔들림이 평화가 될 때
정상희 작가가 제안하는 감상은 화려한 해답이 아닙니다. 오히려 “흔들려도 괜찮다”는 쪽에 더 가깝습니다. 흐릿한 반영은 미완의 자아이고, 그 형상을 끝까지 바라보는 행위는 화해이자 수용입니다. 불안정했던 시절의 조각을 지우지 않고, 다시 품어 안는 과정. 그 과정 끝에서 흔들림은 결핍이 아니라 나를 단단하게 만든 근원으로 전환됩니다.
그래서 이 회화는 조용한 위로를 건넵니다. 크고 확실한 메시지보다, 빛처럼 스며드는 작은 울림으로. 정상희 작가의 화면 앞에서 우리는 잠깐 고개를 숙이고, 일렁이는 반영 속에서 자신의 흔들림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다시 만난 내가, 이전보다 조금 더 따뜻하고 단단해졌으면—그 바람이 작품 전체를 낮고 길게 받쳐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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