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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연 작가, 한지로 쌓아 올린 ‘정온(靜穩)’의 풍경

이화연 작가의 작업은 ‘무엇을 그릴 것인가’보다 ‘어떻게 가라앉을 것인가’에서 시작됩니다. 복잡한 감정이 안쪽에 차곡차곡 쌓이던 시기, 작가가 붙잡은 감각은 교토에서 마주한 고산수식 정원의 질서였어요. 돌과 모래, 자갈처럼 최소한의 요소로도 공간이 사람을 안정시키는 순간. 말이 없는데도 무게가 있는 침묵, 반복되는 선이 만들어내는 간결한 균형. 이화연 작가는 그 고요를 화면 위에 ‘나만의 정원’으로 다시 세워 왔습니다.

이 작업은 격하게 호소하지 않습니다. 대신 천천히 쌓입니다. 한지의 결, 손이 지나간 시간, 말리는 동안 생기는 단단한 표면. 그 축적은 어느새 관람자의 시선도 함께 느리게 만듭니다. 이화연 작가의 화면 앞에서 우리는 ‘의미를 빨리 붙이는 습관’부터 내려놓게 됩니다.

틈, 2024, Hanji and mixed media on panel, 116.8 x 91 cm

교토에서 시작된 고요, 화면의 출발점

이화연 작가가 끌어오는 것은 정원의 외형이 아니라 정원이 만들어내는 ‘안정의 구조’입니다. 고산수식 정원은 단순한 풍경이면서 동시에 그 자체로 추상에 가깝죠. 선과 점, 여백이 관계를 맺고, 그 관계가 마음을 정돈합니다. 작가의 화면에도 같은 원리가 작동합니다. 복잡한 장식을 덜어내고, 남겨진 요소들이 서로를 지탱하도록 두는 방식. 그래서 이 작품은 ‘보는 정원’이 아니라 ‘머무는 정원’처럼 느껴집니다. 작가가 말하는 고요는 분위기가 아니라 태도에 가깝습니다. 불안이 커질수록 더 크게 외치기보다, 더 단순한 구조로 돌아가는 것. 화면은 그 선택을 조용히 유지합니다.

틈, 2024, Hanji and mixed media on panel,
72.7 x 50 cm

손의 반복이 만드는 질서

이화연 작가의 작업은 매우 손이 많이 갑니다. 자와 컴퍼스로 선을 긋고, 손으로 찢은 한지를 한 조각씩 붙여 형태를 잡아갑니다. 그리고 마르고, 다시 덧입혀지고, 또 쌓입니다. 켜켜히 쌓이는 과정이 모여 집약적인 작품의 밀도를 만들어냅니다. 중요한 건 ‘감정을 표현하는 장면’이 아니라 ‘감정이 정리되는 시간’이 화면에 남는다는 점입니다. 하나의 조각 조각을 붙이는 동작이 반복될수록 마음도 한 겹씩 정돈되고, 이는 작품의 질서감으로 바뀝니다. 이화연 작가의 화면이 단단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손의 시간이 차분히 쌓여서입니다.

정온(靜穩), 2024, Hanji and mixed media on panel, 75 x 40 cm 

정온(靜穩), 검은색으로 가라앉는 마음

정온(靜穩)은 이화연 작가가 작업을 통해 닿고자 하는 상태를 가장 정직하게 보여주는 시리즈입니다. 고산수식 정원의 구조를 모티브로 삼되, 풍경을 재현하기보다 점·선·여백의 관계로 ‘고요의 질서’를 조형합니다. 작가의 검은색은 어둠의 상징이 아니라 가장 고요한 바탕입니다. 무엇을 얹어도 크게 흔들리지 않고, 잔잔함을 유지하는 색. 그 검정 위에서는 상념을 흘려보내도 화면이 쉽게 요동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화연 작가의 검정은 무겁기보다 안정적이고, 차갑기보다 오래 머물게 합니다. 관람자는 어느 순간부터 작품을 ‘읽기’보다 ‘바라보기’로 경험하게 되죠. 그 느린 시선이 곧 정온에 가까워지는 감각이 됩니다.


정온의 바다, 2024, Hanji and mixed media on panel, 30 x 30 cm

정온의 바다와 틈(Pause), 파동과 멈춤 사이

정온의 바다는 정원에서 보이는 한 장면—중심의 큰 바위와, 그 주위를 퍼져나가는 동그란 선—에서 출발합니다. 중심의 ‘섬’은 ‘나’처럼 서 있고, 주변의 선들은 내 안에서 번져나가는 파동처럼 움직입니다. 내면은 늘 선명하지 않습니다. 희미하게 보이기도 하고, 어떤 날은 잘 보이지 않기도 하죠. 이 시리즈는 불확실함을 억지로 밝히지 않고, 파동의 리듬으로 조용히 드러나게 둡니다. 그리고 틈(Pause)은 더 절제된 방식으로 ‘잠깐의 멈춤’을 남깁니다. 단순한 화면에 시선이 멈추게 됩니다. 작가는 그 멈춤이야말로 사유와 회복의 시작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이 작품은 설명도, 결론도 서두르지 않습니다. 대신 묻게 합니다. 지금 내 안은 너무 꽉 차 있지 않은지, 비워야 하는 자리는 어디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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