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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누리 작가, 상처를 건너 마음의 수호자를 그리다

말의 형상으로 내면의 시간을 그려내는 회화 작가

노누리 작가의 그림에서 오래 눈에 남는 것은 말입니다. 그의 화면 속 말은 한 장면을 설명하기 위해 놓인 대상이라기보다,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온 감정의 형상에 가깝습니다. 때로는 자신을 비추는 또 하나의 모습처럼, 때로는 흔들리는 마음 곁을 지키는 존재처럼 서 있지요. 그래서 노누리 작가의 회화를 보고 있으면 먼저 이미지를 해석하게 되기보다, 그 안에 스며 있는 시간을 천천히 따라가게 됩니다.

그의 그림에는 상처를 지우려는 태도보다, 상처를 지나온 마음을 가만히 바라보는 태도가 더 짙게 남아 있습니다. 아픔을 덮어버리기보다 그 시간을 품고 가는 일, 무너졌던 자리를 외면하지 않고 끝내 자기 곁으로 돌아오는 일. 노누리 작가의 회화는 바로 그 느린 회복의 감각에서 힘을 얻습니다.

Folding, 2026, Oil on canvas, 91 x 72.7 cm

마음이 머물던 자리

노누리 작가의 작업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그림 이전의 시간입니다. 그는 오랜 시간 글을 쓰며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붙들어왔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법을 배워갔습니다. 마음이 어지러울수록 문장은 더 오래 곁에 남고, 말로 다 적어두지 않으면 흘러가 버릴 것 같은 감정들이 있었을 겁니다.

그렇게 쌓인 시간은 어느 순간 그림으로 옮겨갑니다. 글로 남겨두던 감정이 색과 형상을 입기 시작하고, 문장 사이에 머물던 마음이 하나의 장면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그래서 노누리 작가의 회화에는 감정을 단번에 터뜨리는 방식 대신, 오래 눌러 담아온 시간이 만들어낸 밀도가 있습니다. 조용한데 가볍지 않은 이유도, 바로 그 축적의 시간이 화면 안에 배어 있기 때문입니다.

Rise of Olympus, 2025, Acrylic on canvas, 65.1 x 50 cm

곁을 지키는 형상

노누리 작가의 화면에서 말은 가장 중요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 말은 상징 하나로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습니다. 어떤 장면에서는 작가 자신의 내면을 비추는 또 다른 자아처럼 보이고, 또 어떤 장면에서는 상처 입은 마음을 묵묵히 지켜주는 수호자처럼 다가옵니다. 한 존재 안에 연약함과 강인함이 함께 놓여 있는 셈입니다.

이 점이 노누리 작가의 그림을 더 오래 붙잡아두게 합니다. 그의 말은 단지 아름답거나 신비로운 이미지로 소비되지 않아요. 불안과 위로, 기억과 보호, 흔들림과 버팀 같은 감정들이 한 형상 안에서 함께 숨 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화면 속 말은 설명의 도구가 아니라, 쉽게 말로 옮길 수 없는 마음의 결을 대신 품고 있는 존재로 남습니다.

Under the Golden Moon, 2025, Acrylic on canvas, 45.5 x 45.5 cm

잠시, 다른 곳을 바라보는 일

노누리 작가의 초기 작업에서는 소녀와 말이 함께 있는 장면이 자주 나타납니다. 이 장면들은 환상적인 서사를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기보다, 힘겨운 시간을 지나는 동안 마음이 스스로에게 마련해준 피난처처럼 느껴집니다. 잠시 다른 곳을 상상해보는 일, 지금 있는 자리에서 아주 멀리 벗어나지 못하더라도 마음만은 조금 더 숨 쉬기 편한 곳으로 데려가보는 일 말입니다.

그래서 이 장면들에서 중요한 것은 어디로 떠나는가가 아닙니다. 그보다 먼저, 왜 그런 풍경이 필요했는가에 시선이 머뭅니다. 소녀와 말이 함께 걷는 화면은 누군가의 동화라기보다, 버티는 마음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낸 내면의 풍경에 가깝습니다. 노누리 작가의 그림이 상상처럼 보이면서도 낯설게 멀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비현실의 이야기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한 번쯤 필요했던 마음속 장면을 건드리기 때문입니다.

Standing, 2026, Oil on canvas, 91 x 72.7 cm

오래 바라볼수록 가까워지는 것들

노누리 작가의 회화는 의미를 하나로 묶어두지 않습니다. 그의 경험에서 출발했지만, 그 이야기를 단정적인 결론으로 닫아버리지는 않아요. 대신 화면 앞에 선 사람이 저마다의 감정과 기억을 가져와 머물 수 있도록 여백을 남겨둡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는 위로로 다가가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오래 묻어두었던 기억을 슬며시 불러내는 그림이 됩니다.

이 지점에서 노누리 작가의 회화는 개인의 이야기를 넘어섭니다. 아주 사적인 시간에서 시작했지만, 그 사적인 시간이 오히려 더 넓은 공감으로 이어지는 것이지요. 그가 그리는 말은 한 사람의 내면에서 태어났지만, 그 앞에 선 관람자 역시 자기 안의 상처와 기억을 조용히 마주 보게 됩니다. 그래서 노누리 작가의 그림은 치유를 선언한다기보다, 치유가 시작될 수 있는 자리를 내어주는 쪽에 더 가깝습니다.

노누리 작가의 작업은 아픔을 없애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 시간을 지나온 마음이 어떤 형상을 만나 다시 자기 곁에 설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상처를 덮는 대신 그 위에 빛을 얹는 일, 흔들렸던 마음이 끝내 자신을 지켜낼 수 있는 모습을 그려내는 일. 노누리 작가의 회화는 그렇게 조용하고 단단한 방식으로, 회복이 시작되는 순간을 우리 앞에 펼쳐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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