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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섭 작가, 선으로 쌓아 올린 감정의 시간

감정을 따라 흐르는 선

최형섭 작가의 화면에는 수많은 선이 겹겹이 흐릅니다. 멀리서 보면 잔잔하게 일렁이는 하나의 결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선마다 다른 속도와 두께, 미세한 떨림이 드러납니다. 무엇을 그렸는지보다 “지금 이 선은 어떤 마음에서 나왔을까”라는 생각이 먼저 떠오르게 되는 그림입니다. 구체적인 장면을 설명하기보다, 감정이 지나간 자리와 몸의 움직임이 먼저 다가옵니다.

최형섭 작가는 선을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감정의 진폭을 남기는 방식으로 다룹니다. 연작 ‘Sentimographie’는 감정, 말, 기록의 개념을 엮은 제목으로, 말로 정리되기 전의 상태를 선과 리듬으로 화면에 옮기려는 태도를 담고 있습니다. 붓이 지나간 자리에는 그날의 호흡, 긴장과 이완, 망설임과 다짐이 함께 남습니다. 관람자는 서사나 상징을 찾기보다, 쌓인 선의 결을 따라가며 자신의 감정 상태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됩니다.

Sentimographie N.25.04.02, 2025, Acrylic on canvas, 130.3 × 97 × 3.5 cm

반복으로 쌓이는 시간의 결

최형섭 작가의 작업에서 ‘반복’은 중요한 축입니다. 한 번 그어진 선은 끝이 아니라 시작에 가깝고, 비슷해 보이지만 조금씩 다른 선들이 화면 전체를 채웁니다. 차분하게 쌓인 선들은 어느 순간부터 하나의 지층처럼 느껴지며, 표면에 남은 흔적이 아니라 시간이 눌려 형성된 단면처럼 다가옵니다. 반복은 단조로움이 아니라, 작은 차이들이 모여 깊이를 만들어 내는 방식이 됩니다.

이 구조는 우리가 일상을 통과하는 모습과도 닮아 있습니다. 하루하루의 선택과 감정이 완전히 새롭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어제와 똑같지도 않은 상태로 이어지듯, 선 역시 비슷한 형식을 취하면서도 방향과 리듬이 조금씩 달라집니다. 오늘의 선은 어제의 선 위에 포개지고, 마음에 걸리던 부분은 다음 선이 가려 주거나 드러냅니다. 그렇게 쌓인 화면은 우연과 의도가 겹쳐지는 자리, 최형섭 작가가 ‘살아낸 시간’을 그대로 드러내는 풍경이 됩니다.

Sentimographie N.25.09.05, 2025, Acrylic on canvas, 55 × 45.5 × 2.8 cm

빛과 그림자 사이, 지금 우리는 어디에 서 있을까

최형섭 작가는 빛과 그림자를 서로를 전제로 한 상태로 바라봅니다. 완전히 밝기만 한 순간도, 완전히 어둡기만 한 시간도 드물고, 대부분의 삶은 그 사이를 오가는 흐름에 가깝다고 느낍니다. 작품 속 선들은 어떤 것은 밝게 솟아오르고, 어떤 것은 어두운 색과 함께 스며들며 뒤로 물러납니다. 같은 화면 안에서 색의 농도와 밝기, 겹침의 차이는 자연스럽게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는 구조를 만들고, 그 사이를 오가는 진동은 우리의 시간과 감정과도 겹쳐 보입니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선의 굴곡은 인생의 오르막과 내리막을 떠올리게 하고,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흐름은 어떤 시기에도 우리는 계속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조용히 상기시킵니다. 최형섭 작가의 작품은 정답을 제시하기보다, 각자가 자기 속도의 파장을 바라볼 수 있는 여백을 남겨 둡니다.

Sentimographie pour les missionnaires, 2021, Acrylic on glass

겹쳐진 시간들이 만든 한 사람의 감각

동국대학교에서 불교미술을 전공하고, 마르세유 국립 미술학교에서 예술을 이어 온 시간은 최형섭 작가의 작업 안에서 하나의 감각으로 모입니다. 불교회화에서 익힌 절제된 선과 정신성, 여백의 감각은 화면에 남는 선의 태도와 구조로 이어지고, 유럽에서 쌓인 경험은 색과 구성, 리듬을 보다 자유롭게 다루는 힘이 됩니다. 그래서 그의 회화는 동양과 서양, 추상과 서사라는 이름으로 나뉘기보다, 여러 결이 한 화면 안에서 겹쳐진 끝에 생겨난 한 사람의 시선처럼 느껴집니다. 관람자는 복잡한 이론을 떠올리지 않아도, 흐르는 선과 파동, 빛과 그림자를 따라가며 자신의 감정과 시간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됩니다. 작품 앞에 잠시 멈춰 서 있는 그 짧은 순간이, 마음속에 남아 있던 파장을 천천히 드러내는 시간으로 바뀌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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