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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혜림 작가, 도시를 닮은 마음의 지도

도시에 마음을 그리다

우혜림 작가는 오랫동안 자신을 현실적인 사람이라고 믿어왔습니다. 무난해 보이는 선택과 타당해 보이는 이유, 남들이 봐도 안정적으로 보이는 길을 걸어왔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작품을 이어갈수록, 자신이 믿었던 ‘현실’은 사실 완전한 현실도, 그렇다고 이상도 아닌 애매한 중간 지점에 가깝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머물렀다고 생각했던 자리에 안심이 깃들기보다는, 말로 다 표현되지 않는 혼란이 남아 있었던 거죠.

바로 이때부터 우혜림 작가의 회화가 시작됩니다. 쉽게 설명되지 않는 마음의 상태, 잠깐 스쳐간 장면들, 이유를 알기 전에 먼저 찾아오는 감정들을 도시 풍경에 담아냅니다. 캔버스 속 도시는 실제 공간이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심리를 그려내는 마음의 지도입니다. 그 안을 채우는 건물들은 딱딱한 구조물이라기보다 감정이 덩어리진 채 형태를 이루는 존재로 다가옵니다. 기울고 겹쳐지고 흐릿해지는 건물들 사이에서 도시는 곧 마음이고, 건물 하나하나엔 자신이 투영되어 있음을 천천히 드러냅니다.

…moment, 나, 2018, Oil on canvas, 65.1 × 90.9 cm

어둠과 빛 사이, 잠시 머무는 시간

우혜림 작가의 작품엔 도시의 밤이 자주 등장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익숙한 깊고 어두운 검정 대신, 부드럽게 겹쳐지는 색의 층들이 화면을 이끕니다. 하루가 끝나고 피로와 생각이 고요히 내려앉는 시간, 완전히 어둡지도, 또 밝지도 않은 그 애매한 경계의 순간을 닮았죠. 작가는 빛과 그림자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 감정의 지대에 색을 붙잡아 두려 합니다.

그래서 작품은 쉽사리 우울이나 단순한 위로로 빠지지 않습니다. 도시를 지나며 쌓인 피로, 그럼에도 도시에 대한 애정, 어쩔 수 없는 무력감이 한 화면 안에서 뒤섞입니다. 관람자는 겹겹이 쌓인 색의 층을 따라가며, 자신 안에 남아 있던 비슷한 감정들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작가가 붙잡은 ‘아직 명확히 이름 붙여지지 않은 마음의 상태’를 함께 통과하게 됩니다.

…moment, 잠시만 쉬자, 2024, Oil on canvas, 65.1 × 45.5 cm

건물과 창문을 통해 전해지는 마음

우혜림 작가의 작품엔 사람 모습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작품을 오래 바라보고 있다 보면, 누군가의 기척이 분명히 배어 있다는 느낌이 스며듭니다. 인물의 얼굴 대신 건물의 기울기, 골목의 방향, 창문을 통과해 번지는 희미한 빛이 감정의 주체를 암시합니다. 도시 풍경은 어느새 한 사람의 몸과 마음을 대신하게 되죠.

조금씩 기울거나 흐릿하게 지워진 건물은 겉으론 반듯해 보이지만 실제론 계속 흔들리는 내면을 닮았습니다. 창문 너머의 빛은 누군가와 함께 머물 수 있는 자리 같기도 하고, 아직 도착하지 못한 마음의 공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 빛이 희망일지, 이미 멀어진 잔광일지, 막 떠오르는 가능성일지는 열어 둔 채 남겨둡니다. 각자의 경험과 언어로 그 빈 곳을 채우도록 여지를 남겨두는 이 열린 태도 자체가 우혜림 작가 작업의 큰 특징입니다.

…moment, 다시 나, 2018, Oil on canvas, 112.1 × 162.2 cm

밑그림처럼 남아 있는 도시와 마음

우혜림 작가가 그려내는 도시는 완성된 결과라기보다는 계속 그려지고 지워지는 밑그림에 더 가깝습니다. 선은 다시 그려지고, 색은 겹겹이 쌓여갑니다. 어떤 건물은 선명한데, 어떤 부분은 아예 흐릿하게 풀려 있죠. 화면 곳곳에 남은 틈과 비어 있는 공간은 단순한 여백이 아니라, 감정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머무는 순간을 표시하는 자리처럼 다가옵니다.

그 앞에 서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지금 나는 어디쯤에 머물렀다고 믿고 있었던 걸까. 내가 현실이라고 부르던 것은 실제로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내가 바라보는 이 도시는 그냥 풍경일 뿐일까, 아니면 내 마음의 구조물일까. 우혜림 작가는 혼란이 다 정리되고 난 뒤에 남는 결론보다는, 아직 말로 다 표현되지 않은 순간 자체를 그림에 담습니다. 작품 앞에 선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천천히 되짚어보고, 완벽한 답 대신 다시 고민할 여지를 얻게 됩니다. 어쩌면 그 여지가 오늘 하루를 버티게 해 주는 가장 현실적인 위로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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