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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이 먼저 움직이는 순간
추가비 작가의 작업은 생각이 정리된 뒤에 시작되기보다, 몸이 먼저 반응한 순간에서 출발합니다. 하루의 시간대에 따라 달라지는 기운, 그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움직임과 태도, 반복되는 일상의 리듬이 작업의 바탕이 됩니다. 음악을 듣고, 몸을 움직이고, 정리를 하고, 차와 커피를 만들며 미묘한 맛의 변화를 느끼는 일은 단순한 생활의 장면이 아니라 내면의 상태를 드러내는 감각의 기록이 됩니다. 그래서 화면에 남는 형상들은 어떤 사건을 설명하는 이미지라기보다, 지나가며 남은 감정의 결에 더 가깝게 다가옵니다.
그가 펼쳐 보이는 세계는 분명한 서사보다 상태에 가깝습니다. 선은 생각의 결과라기보다 흔들렸던 마음의 자취처럼 남고, 반복되는 형태는 무의식적으로 되풀이된 감정의 리듬처럼 쌓입니다. 그래서 작품 앞에서는 무엇을 읽어내야 하는지보다, 지금 어떤 감각이 먼저 닿는지가 더 중요해집니다. 추가비 작가의 작업은 한 번에 이해되는 장면보다, 오래 바라볼수록 서서히 마음에 번지는 내면의 풍경에 더 가깝습니다.

나를 지탱하는 것들의 모양
추가비 작가의 작업에는 자아가 저절로 서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인식이 짙게 배어 있습니다. 우리는 감정, 관계, 인정, 노력, 의미 같은 수많은 조건 위에서 스스로를 유지하며 살아갑니다. 그것들은 분명 우리를 세워 주는 기반이 되지만, 동시에 더 쉽게 흔들리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기대는 것이 많아질수록 더 높이 올라갈 수는 있어도, 그만큼 더 많은 긴장과 불안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작업에서 반복적으로 느껴지는 구조와 균형의 감각은 바로 이 불안정한 자아의 형상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때 화면 속 구조는 단단한 안식처나 완성된 집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너지지 않기 위해 계속 힘을 주어야 하는 상태, 붙들고 있어야 겨우 유지되는 마음의 자세에 더 가깝습니다. 지탱하는 요소가 많아질수록 삶은 단단해지는 것 같지만, 그만큼 집착도 짙어집니다. 추가비 작가의 작업은 바로 그 지점을 조용히 건드립니다. 나를 세워 준다고 믿었던 것들이 वास्तव에는 나를 더 흔들리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내가 붙잡고 있는 것들이 삶의 기반인지 아니면 놓지 못하는 감정의 습관인지 차분히 돌아보게 만듭니다.

가까움과 어긋남 사이
추가비 작가의 작업에는 관계를 바라보는 섬세한 감각도 함께 놓여 있습니다. 서로를 바라보고 인식하는 상태 안에는 사랑도 있고, 긴장도 있고, 말로 다 꺼내지 못한 침묵도 있습니다. 하지만 같은 시간을 살아가고 같은 공간에 머문다고 해서 늘 서로를 중심에 두는 것은 아닙니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관계, 분명 영향을 주고받지만 끝내 완전히 포개지지는 않는 마음의 간격이 존재합니다. 그의 작업은 그런 관계의 결을 서둘러 정리하지 않고, 화면 안에 그대로 남겨 둡니다.
그래서 이 작업에서 관계는 따뜻함이나 상처처럼 하나의 감정으로 쉽게 묶이지 않습니다. 비슷해 보이는 감정도 서로 다른 결을 지니고 있고, 같은 장면을 함께 지나도 각자에게 남는 감각은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추가비 작가의 화면은 관계를 낭만적으로 봉합하지도, 차갑게 끊어내지도 않습니다. 대신 가까움과 어긋남이 함께 놓인 상태를 조용히 보여 줍니다. 그 여백은 단절이라기보다 아직 다 설명되지 않은 거리이며, 작품은 그 모호함을 지우지 않은 채 관계가 가진 여러 겹의 감정을 오래 바라보게 만듭니다.

붙잡는 마음에서 몸의 시간으로
최근 추가비 작가의 작업에서는 자아의 비중이 이전과는 조금 다르게 놓이는 인상도 읽힙니다. 자아가 화면의 중심에서 모든 것을 끌고 가기보다, 필요할 때 작동하고 다시 한 걸음 물러서는 쪽으로 무게가 옮겨간 듯 보입니다. 이것은 자아가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이전처럼 모든 판단과 감정을 앞세우지 않게 되었다는 뜻에 더 가깝습니다. 생각을 완전히 없애려 하기보다 생각에 끌려가지 않으려는 태도, 끊임없이 증명하려 하기보다 조금 덜 붙잡고 오래 버티려는 자세가 화면의 결에도 스며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무언가를 더 쌓아 올리는 방향보다, 이미 놓여 있는 것을 받아들이며 몸의 시간에 가까워지는 쪽으로 나아갑니다. 개념보다 반복, 설명보다 수행, 판단보다 리듬이 조금 더 앞으로 나오는 것이죠. 그 변화는 화면을 더 조용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더 약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덜 과시적이기 때문에 더 단단하고, 덜 설명적이기 때문에 더 오래 남습니다. 추가비 작가의 작업이 끝내 보여주는 것은 하나의 해답이 아니라, 흔들림을 지나면서도 무너지지 않고 자기 리듬을 다시 찾아가는 내면의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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